마을의 전설과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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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전리

  • 갈전리는 안동시에서 청송군으로 넘어가는 가래재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원래 임하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23년(1895)에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임동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정리에 따라 추곡과 신곡을 병합하여 오늘에 이른다. 갈전리는 1리와 2리로 구별되어 있다. 갈전리는 갈전, 갈밭으로 부르는데 칡덩쿨이 일대에 무성하게 번져있는 것을 개척하여 이룬 마을이라고 한데서 유래하였다. 갈전리에는 현재 87가구에 216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고천리

  • 고천리는 안동에서 청송으로 넘어가는 가래재 아래에 위치한다. 갈전교를 지나 가래재를 오르기 전 우측에 난 도로를 따라 산굽이를 돌아서 3km 정도 들어간 동쪽에 위치한다. 고천리는 1리와 2리로 나뉘어져 있으며 현재 145가구에 359명의 주민들이 거주한다.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기 전 고천리에는 양지마, 독점, 평지마, 모시골, 어신골, 덜갱이, 다릿골 등 7개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양지마와 독점, 다릿골은 수몰되었거나 일부만 남아있다. 양지마는 고천리에서 가장 큰 자연마을이었으며 양지 쪽에 위치하였다고 해서 양촌(陽村), 양지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독점은 양지마 서쪽에 위치하였으며 옹기를 제작하기 위해 만든 독굴이 있었다고 해서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다릿골은 마을 주위에 다리가 있어서 불리워진 명칭이다. 수물된 지역에 살았던 주민들은 고천리의 다른 자연마을에 이주하여 살거나 아예 고천리를 떠난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일부 주민들은 고천리에서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여 살기도 한다.

마리

  • 안동시내에서 청송방면의 국도를 따라 가면 망천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면 망천2리가 나온다. 마리는 망천2리에서 성진재라는 고개를 넘으면 나타난다.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예전의 마을은 거의 대부분 수몰되어 사라지고 수몰지역에 살았던 주민들이 이주하여 마리의 여러 자연마을에 분산하여 살고 있다. 마리에는 현재 30가구에 71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마리를 구성하고 있는 자연마을은 모두 5개이다. 마리는 원래 안동군 임북면의 지역이었으며 삼한시대에 마읍군(馬邑郡)이 있었다고 하여 마읍, 맛골, 마읍촌이라 하였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세천, 도수곡, 신기, 사곡을 병합하여 마동이 되었고 1934년에는 월곡면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는 일부는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되자 임동면에 편입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마령리

  • 이 마을은 임동면의 동북쪽에 위치한다. 임동면의 소재지인 중평리에서 청송방면으로 2km 정도 가다가 왼쪽에 난 길로 접어든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마령교라는 다리가 나오고 이 다리를 건너서 좌측으로 5km 정도 가면 우측에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마령단지이다. 수몰되기 전의 이 마을 명칭은 맛재, 마령이라고 하였다. 마을 모습이 우마(牛馬)가 짐을 싣고 있는 형국, 또는 말발굽 형상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수몰되기 전 이 마을에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옛날 이 마을 뒷산에서 노승이 내려와 마을 정자 앞에서 급사하니 동네 사람들이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 날 밤 그 노승이 마을 사람들에게 현몽하여 사당을 지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말발굽 모양이 갈라진 자리에 승당(僧堂)을 짓고,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제사를 올리고 굿을 하여 영혼을 위로하는 행사를 행하였다고 한다는 것이다. 마령리는 1리, 2리, 3리로 나누어진다. 1리는 현재 마령단지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마령리의 수몰민들이 새로 형성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리는 이식골이라는 자연마을로 되어 있으며 3리는 지리실, 한내골, 골마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마령리는 원래 임하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1895)에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안동군 임동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14년에 인근의 쇠랑실, 우무골, 이식골, 송골, 지리실, 한내골 등을 병합하여 근래에까지 오다가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현재 마령리에는 99가구에 257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수몰되기 전에는 운곡(雲谷), 가르편, 쇠랑실, 이식골, 새터, 후생촌, 용점, 송골, 한내골, 지리실, 골이식골, 골마 등이 있었으나 대부분 수몰되었다. 지금은 행하여지지 않지만 수몰 전 마령리에서는 매년 지내는 당고사와 달리 10년 만에 한번씩 별신굿을 가졌다. 이 별신굿은 보통 동해안 영해 지방에서 대여섯 명의 무당에 의해서 행하여진다. 정월 대보름 새벽에 일반적으로 다른 마을에서 올리는 것과 비슷하게 당고사를 올리고 날이 밝으면서 행해지는 별신굿은 풍물의 지신밟기와 걸립, 몇 개의 작은 마을 앞에서 벌어지는 호랑이와 허수아비 잡기, 당에서의 당내림 그리고 무당굿으로 되어있다. 마을 사람들이 치는 풍물은 대보름날 아침부터 망대를 앞세우고 각 마을을 돌아가며 집집마다 지신을 눌러주고 관람한다. 당대는 큰 소나무를 새로 베어 만든 것으로 여기에 창호지 조각, 종이꽃 등을 매어단다. 그리고, 집을 다니며 걸립할 때마다 사람들은 당대에 울긋불긋한 인조 헝겊 조각이나 작은 주머니를 달기도 하며, 방울을 사다가 달기도 한다. 작은 주머니 속에는 일·이백원 정도를 넣는다. 걸립이 끝나면 솔잎이 안보일 정도로 달려 있다. 이 때 걸립한 돈으로 별신굿의 경비를 충당한다. 대보름날에 걸립이 끝나고 이튿날에는 다른 작은마을 입구에서 호랑이를 잡는 놀이를 한다. 호랑이는 짚으로 만들고, 겉에는 종이를 발라서 물감으로 그린다. 풍물을 치는 가운데, 포수가 총으로 호랑이를 잡는 시늉을 한다 포수는 호랑이를 잡으러 가다가 신발이 떨어졌다고 신발값을, 담배가 떨어졌다고 담배값을, 물건을 잃었다고 물건값을 달라고 하면, 사람들은 돈을 조금씩 준다. 호랑이를 모두 잡으면 큰마 입구에서 허수아비 두 마리를 같은 방법으로 잡는 놀이를 벌인다. 허수아비를 잡으면 당대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면서 당집으로 간다. 당집에서 무당의 축원에 의해 당내림이 시작된다. 깨끗한 사람이 당대를 들고 무당은 정성을 올린다. 호랑이나 허수아비를 모두 잡았으니 내려오십사하고 축원을 올리며 정성을 드린다. 무당의 정성이 지극해서 잘 들으면 신이 쉽게 내린다고 한다. 내림이 안되면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당대를 잡는다. 신이 내리면 당대를 잡은 사람은 그 무거운 소나무 당대를 어깨에 메고 춤을 출 정도로 뛴다. 당대가 내리면 다시 풍물을 치고 당터의 지신을 누른다. 그리고 무당은 마을의 깨끗한 사람의 소지를 올린다. 이 당대 내림은 신에게 굿을 해도 좋은가를 허락받는 표적이라고 한다. 이어서 무당이 굿을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안 밝혀지고 있다. 호랑이와 허수아비는 그 다음날 동공사에서 모든 결산을 본 다음에 불에 태운다. 이 때에도 풍물을 계속 친다. 이 별신굿은 수몰되기 전까지 행해졌으나 현재는 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을의 제사와 함께 치러지는 행사로서 새해를 맞이하여 마을에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사악한 일들을 호랑이와 허수아비로 대신해서 물리치거나 없앤다는 뜻에서 생긴 주술적인 놀이로 보인다. 또한 산골이기 때문에 입은 들짐승들의 피해를 예방한다는 의미에서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마을의 안녕과 가축 보호라는 생활의 필요성과 10년 만에 한번씩 즐겨 노는데서 생기는 일상생활의 변화를 얻고자 행하여지는 마을 공동행사의 하나인 것이었다.

망천리

  • 안동시내에서 청송방면의 국도를 따라 15km 정도 가면 오른쪽에 임하댐의 본댐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여기부터 망천리로 접어드는데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망천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망천교를 건너서 바로 좌측 길로 접어들면 망천2리로 가는 길이 나온다. 그리고 망천교를 건너서 직진을 하면 다시 대평교라는 다리가 나오고 이 다리를 들어서기 전 좌측에 길이 있다. 이 길로 접어들면 망천1리가 나온다. 망천2리는 입구에서 도로를 따라 2km 정도 따라 들어가면 나타난다. 망천1리는 국도변을 따라 쭉 이어지는 지역부터 대평교 밑에서 들어간 마을까지이다. 현재 망천1·2리에는 63가구에 164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망천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임당리와 통합하면서 망천동이라 하였고 1932년 임하현에 속하였다가 다시 임동면에 속하게 되었다. 망천리는 망지내라고 한다.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원래의 마을은 수몰되고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으나 마을 명칭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망천이란 명칭은 이 마을의 명칭일 뿐만 아니라 행정리의 명칭이기도 한다. 마을 명칭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고려말에 염흥방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사병을 길러 그 세력이 막강하자 약탈을 일삼았다. 나라에서 관군을 보내어 마을 앞 반변천(半邊川)에서 토벌하니 그 사병들이 이곳에서 전멸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곳을 망지내(亡地川)라 칭하였다. 그러나 그 후 지명에 망(亡)자가 있어 좋지 않다고 하여 망천으로 고쳤다.

박곡리

  • 박곡리는 임동의 동남쪽에 있다. 박곡리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개 있는데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길은 수곡리를 거쳐서 가는 것이다. 수곡리에서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를 따라 4km 정도 가면 마을이 나타난다. 박곡리는 원래 임하현에 속한 지역이었다. 고종 32년(1895)에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안동군 임동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석현, 오잠을 통합하여 박곡동(리)이라고 하였다. 임하댐이 건설되기 전 박곡리에는 박실(아랫박실, 하박), 웃박실(상박), 돌고개(석현), 오잠, 매삿골, 쇳골(셋골, 우곡)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으나 수몰로 인하여 박실, 돌고개, 쇳골 등은 사라지고 오잠은 망천리로 편입되었다. 현재 박곡리를 구성하고 있는 자연마을은 웃박실, 매삿골 그리고 지례리에서 이건한 예술촌, 감당 등이다. 박곡리라고 행정명칭을 따 온 것은 수몰된 박실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을이 큰 골짜기에 위치하면서 그 지세가 항아리와 유사하다고 하여 호곡(壺谷)이라 하였다가 다시 박모양과 같다고 하여 호곡(瓠谷)이라 하였으며 또 박곡(博谷)으로 부르다가 박곡(朴谷)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또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염씨 중 정승을 지낸 사람이 벼슬에서 물러나 박을 가꾸면서 지냈다고 하여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박곡리를 처음 개척한 성씨는 염씨였으며 후에 권씨, 류씨가 들어와 살았다고 하나 현재는 여러 성씨들이 살고 있다. 현재 박곡리에는 38가구에 74명이 살고 있다.

사월리

  • 사월리는 임하면 소재지가 있는 중평리의 뒤쪽에 난 도로를 따라 4km 정도 가서 금당이재라는 높은 재를 넘으면 나타난다. 원래 안동군 임북면의 지역으로서 마을 지형이 달과 같이 생기고 강에 모래가 많았어 사월, 사드레, 사들, 사월천, 사평 등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부여동, 미질리 일부를 통합하여 사월동(리)이 되었다. 그 후 1934년 동후면과 통합하면서 동후면의 소재지인 도곡과 사월을 합쳐 월곡면이 되었다가 1974년 월곡면이 없어지면서 임동면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사월리에는 87가구에 199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수곡리

  • 수곡리는 전주류씨의 동성마을이다. 조선 명종(明宗) 때 류성(柳城) 선생이 이곳에 입향하였으며 당시 마을 뒤 아기산(峨岐山)에서 물줄기가 마을을 둘러싼 형상으로 흐르고 있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현재 수곡리는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신단지를 만들어 마을을 새로이 형성하였다. 그리고 수몰민 일부는 구미의 해평면 일선리에 새로운 정착지를 만들어 이주하였다. 수몰되기 전 수곡리에는 한들, 원두들, 늘침, 도골, 밤나무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으나 거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일부분만 남아있다. 수곡리는 원래 임하현의 지역이었다.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안동군 임동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대평, 원파, 늘치미, 독골, 박곡리 일부와 중평리 일부를 통합하여 수곡리가 되었다. 현재 수곡리에는 57가구에 13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위리

  • 위리는 임동면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안면과 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위리는 원래 임하현에 속하였으며 마을이 위쪽에 있다고 하여 윗골, 위곡, 위동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위리 앞에 흐르는 작은 하천이 있는데 현재의 대곡천이다. 대곡천이라 하기 전에는 위천(渭川), 위수(渭水)라고 하였는데 수원이 풍부한 위수가 흐르는 마을이라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혁에 의하여 임하현에서 안동군 임동면으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기를 병합하여 위동이라고 하면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현재 위리는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된 지역에서 이주한 주민들이 새로 형성한 1리와 기존의 자연마을로 구성된 2리로 나뉘어져 있다. 위1·2리에는 91가구 232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중평리

  • 중평리는 임동면의 소재지이다. 안동시내에서 청송방면의 국도를 따라 25㎞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중평리는 원래 임하현의 지역으로 두 하천이 합치는 중간 지역이라 하여 중드루, 또는 중평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고종 32년 지방관제 개편에 의하여 안동군 임동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편기리, 신평, 구마골을 병합하여 중평동(리)이라 하였다. 그 후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옛터는 모두 수몰되고 현재의 신단지로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자연마을은 사라지고 단지 행정명칭인 중평1리와 2리가 있다. 현재 중평리는 임동면에서 가장 큰 곳으로 211가구에 604명이 거주하고 있다. 수몰되기 전 중평리에는 챗거리, 웃챗거리, 말뚝소, 굴매골, 새들, 쑥쟁이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챗거리는 중평리의 원마을으로서 편항리(鞭港里), 중평이라고 하였는데 영덕 등의 동해안의 산물과 안동 등 내륙의 산물이 통과하는 관문으로 이것을 운반하는 우마차와 우마의 채찍소리가 밤낮으로 끊기지 않았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또 우마의 채찍을 마련하는 거리(마을)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임동 챗거리의 장날은 5일과 10일이다. 웃챗거리는 우책걸, 상평이라고도 하는데 챗거리의 윗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옛날 우마차를 사용하던 시대에 상인들의 속박과 편마(片馬)의 축사가 운집된 마을이라 하여 웃챗거리라고도 했다. 말뚝소는 웃챗거리 앞 냇가를 이르는 말인데, 옛날 소나 말의 고삐를 매워두던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굴매골은 구마곡(九馬谷)이라고도 하는데 지세가 아홉마리의 말을 채찍질하는 형용이라 하여 구마곡(九馬谷)이라 했는데, 음이 변하여 굴매골로 되었다. 이 마을 앞에 임동중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새들은 신평이라고도 하는데 챗거리 마을이 형성된 뒤에 새로 조성하여 마을을 두었다고 하여 새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쑥쟁이는 쑥재라고도 하는데 옛날 말을 마동(馬洞)으로 몰아 넣어 쉬게 하였는데 그 말을 지키며 숙직한다고 하여 쑥재라고 불렀다.

지리

  • 지리는 원래 임하현의 지역이었다. 그러나 고종 32년에 임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지동, 하지동, 검단리 일부 지역을 통합하여 지동이라 하고 길안면에 속하였다. 그 후 1974년에 다시 임동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리의 자연마을은 현재 2개 마을만 남아있는데 원래는 갓골, 새밤, 밀미, 갈바들, 논실 등 모두 5개이었다. 그러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3개 마을은 없어지고 갓골과 새밤만 남아있다. 현재 지리에는 46가구에 97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지리는 임동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청송군과 접경지역으로 마을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청송지역이다.

대곡리

  • 대곡리는 임동면의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1리와 2리로 구성되었으며 임동면 위리와 예안면과 접하여 있다. 대곡리는 원래 임하현의 지역이었으나 고종 32년(1895)에 안동군 임동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복수천, 해천, 신평, 고토, 금수천, 고사, 갈마곡과 위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곡동(리)이라고 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곡리의 가구는 모두 140호이며 244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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