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전설과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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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

  • 본래 안동부 동부의 지역으로서 안동부성의 북문이 있었으므로 그에 접한 거리를 북문거리 또는 북문통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율세동(栗世洞)의 일부를 잘라서 이곳에 있는 태사묘(太師廟)의 이름을 따서 태사정(太師町)이라 하다가 1947년 일본식(日本式) 동명 을 변경할 때 북문동으로 고쳤다.

서문안·서문내동(西門內洞)

  • 안동부성(安東府城)을 중심하여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 북문(北門)이 있었는데 그 중 서문(西門)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서문안이라고 하였다.

지변(地變)·지변동(池邊洞)

  • 늪갓의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연못의 변두리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지변동이라는 명 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 땅의 모습이 자꾸 변한다는 뜻에서 지변이라고도 하며 연못에서 때 로는 들이 끊어 올라 변경(變更)을 많이 시켰다고 하여 붙인 것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을 중심 으로 안동의 동채싸움이 많이 시행되었다고 한다.

목성(木城)

  • 목성산(木城山)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목성으로 부르게 되었다. 산 모양이 누에 머리 모양 으로 생겼고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많이 먹였다고 한다.

동문

  • 본래 안동부의 동부지역으로서 안동성(安東城)의 동문 부근에 있었으므로 동문거리 또는 동문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동부동에 편입되었고 1931년 4월 1일 안동읍제 실시에 의하여 본정(本町) 1정목(町目)으로 되었다. 그 후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동문동으로 고쳤다.

운흥동(雲興洞)

  • 본래 안동부 동부의 지역으로서 운흥사(雲興寺)가 있었으므로 운흥이라 하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동부동에 편입되고 1931년 안동읍제 실시에 의하여 팔광정 1정목이 되었다가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운흥동으로 다시 고치게 되었다.

남문동

  • 본래 안동부의 지역으로서 안동부성(安東府城)의 남문 부근에 있었다고 하여 남문거리 또는 남문가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여기를 지나서 대구로 가는 도로가 있었고 남문 앞에는 집때거리라는 큰 돛대가 세워져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없어졌다. 현재 국민은행이 있는 곳이다.

남부동(南部洞)

  • 안동부의 남쪽에 있었다고 해서 남문거리하고 하며 1931년 4월 1일 안동읍제 실시에 따라 동부동의 일부를 잘라서 남문정(南門町) 1정목이라 하다가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남부동이라 하였다.

천리(泉里)

  • 옛날에 큰 샘이 있었으므로 샘결 또는 샘마을, 천리라고 불렀다. 안동시의 하수가 이곳으로 흘러 장마철이면 침수되어 쓸모가 없는 곳이어서 이곳을 메워 지금은 주택가를 이루고 있으나 낙동강 수위가 높아지면 침수의 염려가 있었다. 이 마을에는 샘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임진왜란 당시로 거슬로 올라가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권율(權慄) 장군의 휘하에서 전령(戰令)으로 있던 권명수(權命水)란 사람이 안동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목이 몹시 말라서 샘물을 찾던 차에 작은 길가에 있는 맑은 샘물을 발견하였다. 엎드려 샘물을 마음껏 들이킨 다음에 머리를 들면서 앞쪽에 보이는 영남산을 바라보니 여자의 둔부와 같은 모양의 봉우리가 정면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이를 본 권명수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 마을은 물이 마르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그 샘은 천지(泉池)라 하였고, 마을 이름도 천리동이라 일컫게 되었다. 그는 이 마을에 물이 마르지 않으리라는 길한 예언을 하는 한편, 영남산의 봉우리 모양이 여자의 둔부와 같이 생겼으므로, 장차 이곳의 부녀들이 정숙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도 함께 하였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그 방지책을 물었더니 3일간을 머물면서 궁리한 끝에 그 방지책을 가르쳐 주었다. 부정한 정기(精氣)가 감도는 이 지역에 촛대봉만 남기고 다른 샘이나 웅덩이는 모두 메우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마을 부녀들의 탈선을 막는 길이라고 가르쳐 준 것이다. 권명수가 길을 떠난 후에 이 마을의 웅덩이와 샘물이 날이 갈수록 메워져서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지켜보았더니 한밤중에 남자들이 여자들 몰래 돌과 모래로 웅덩이와 샘을 메우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천리샘을 제외한 다른 샘은 모두 메워져 버렸다. 그 이후 천리동에는 현모양처(賢母良妻)만 출생하여 이 마을 부녀들의 어질고 정숙한 행실이 이웃 마을까지 두루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소문을 전해들은 이웃 마을의 유수(有數)한 가문에서 이 마을 규수들과 혼인을 하고자 하는 이가 계속 늘어났다. 그래서 어느 날이고 매파(媒婆)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율세동(栗世洞)

  • 이 마을의 명칭은 고려시대부터 불리던 지명이며 밤나무가 많이 있는 골이라 하여 밤적골이라 고 하였다. 또 안동의 동쪽에 있는 지역으로서 큰 절이 있었으므로 밤절골이라고 하였다는 이야 기도 전해진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세리(新世里)와 안막리(安幕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율세동이라 하였다. 그 후 1931년 읍제(邑第) 실시에 의하여 일부를 갈라서 앵정이라 하다가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옥정동에서 율세동으로 다시 분리되었다. 이 골짜기 양쪽에 호암(虎岩)과 적암(賊岩)의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들이 서로 싸우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안동부에 살인사건이 많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에 안동부사 김가진이 부임하여 이곳에 장인촌을 만들어 장인들을 살도록 하여 그 방패(防牌)가 되도록 하였더니 살인사건이 일 어나지 않았다 한다. 그 바위는 안동 가톨릭상지대학과 주택이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옥정동(玉井洞)

  • 본래 안동부 동부의 지역으로서 맑고 큰 우물이 있었다고 하여 신정리라 하였다. 1914년 7월 5 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율세동에 편입되고 1931년 4월 1일 안동읍제(安東邑制) 실시에 따라 율세동의 일부를 잘라서 앵정이라 부르다가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옥정(玉井)으로 고쳤다. 옥정동의 우물은 감리교회 정문 맞은편 집과 농협중앙회 앞 음식의 거리 입구 부근의 개천 그리 고 구군청 앞에 있었다고 한다. 옥정은 원래 밤에도 물밑이 훤하게 밝아서 어두운 한 밤중에도 물을 기를 수 있었고, 여름날 날씨가 가물어서 시내의 모든 샘물이 말라도 옥정은 늘 물이 풍족 하게 넘쳤다고 한다. 그래서 멀리 법석골이나 잿골 주민들이 물지게를 지고 옥정동의 옥정까지 물을 얻으려 왔다. 그러나, 어느 때 도둑이 샘물 밑의 옥돌을 훔쳤다고 한다. 그 때부터 옥정이 어두워졌는데 물은 그 후에도 전혀 줄지 않고 솟았다고 한다.

법흥(法興)

  • 지금의 임청각(臨淸閣) 부근으로 신라 때 법흥사(法興寺)가 있어서 이 일대를 법흥이라 하였다. 그 당시에는 탑골과 평지가 포함되었다. 고성이씨가 그 지역에 정착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상아동(象牙洞)

  • 상아동의 원마을로 지형이 상아(象牙)처럼 생긴데서 연유되었으며 코끼리 이빨에 해당하는 자 리에 큰 나무를 심었다고 하나 현재는 빈터로 남아 있다. 1914년에 안막동에 편입되었다가 1947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상아동이 되었다.

신세동

  • 옛날에 새 절이 있었다 하여 새절골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1947년 동명 변경에 따라 신세동에 속 하게 되었고 현재는 영남산 중턱에 집을 지어 오손도손 정답게 살아가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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