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전설과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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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평리(廣坪里)

  • 광평리는 북후면 도촌리와 경계하고 있다. 국도 5호선이 리의 동쪽을 가로질러 북후면으로 연결된다. 광평이란 지명은 천등산 자락에 넓고 평평한 바위가 많아 너븐들이라 불렀는데 한자로 넓을 광(廣) 자에 들 평(坪) 자를 써서 광평리라 하였다. 행정구역으로는 1리와 2리로 나뉘어 있다. 자연마을 현황은 1리에 너븐들(광평), 추산 2개의 마을에 64세대 194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으며, 2리에는 진사리, 가야, 연등골, 안골(內洞) 등 4개의 마을에 68세대 172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리(校里)

  • 교리는 송야천(松夜川)을 경계로 하여 안동시 노하동과 마주하고 있다. 시내에서 솔밤다리를 건너 봉정사로 향하는 지방도로와 연접한 마을로 남쪽으로는 풍산읍 막곡리와 경계하고 있다. 교리라는 지명은 고려시대 안동의 옛 지명이 복주였을 때에 이 지역에 향교가 있었다고 해서 향교골 또는 행겟골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평촌리와 대석동을 병합하여 교리라 하였다. 자연마을은 새마을, 평촌, 한석골, 시묘골, 운곡 등 5개 마을에 98세대 294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계리(金溪里)

  • 영가지(永嘉誌)의 기록에 의하면 "속명은 금음지 또는 금계라 한다.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옛날에 칭하기를 천년 동안 패하지 않는 땅[千年不敗之地]이라고 했다. 판사복시사 배상지가 여기에 살았는데 백죽당이 있다. 용재 이종준, 판서 권예도 또한 여기에서 태어났다. 학봉 김성일이 임하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았다. 여염집이 가득하고 한 줄기 냇물이 중간을 가로질렀는데 70을 넘은 늙은이가 집을 잇대어 사니 온 고을에서 일컬어 노인촌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영가지의 기록을 보더라도 조선전기에 금계마을을 대표하는 성씨는 흥해 배씨와 안동 권씨였다면 조선 중후기에는 의성 김씨인 학봉의 후손들이다. 학봉은 임하 천전[내앞마을]에서 청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금계에 사는 권덕황의 사위가 되어 1582년에 금계로 이주하였다. 학봉은 이 금계에서 실제 살았던 기간은 불과 1년 반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주자서절요]와 퇴계의 [자성록]을 간행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청성산 기슭에 석문정사를 지어 안동지역 학문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금계리는 마을의 지세가 거문고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금지라 불렀으나 학봉 선생이 이곳으로 옮겨와 검재로 고치고 한자로 금계라 적었다.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로 유명한 곳인 금계리는 행정구역으로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원주(原州) 변씨(邊氏), 의성(義城) 김씨(金氏), 안동(安東) 장씨(張氏)의 집성마을이다. 자연마을은 1리에 알실, 음지, 복당, 사망, 검제 등 5개의 마을에 116세대 306명의 주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리에는 미리미, 작장골, 마누이, 텃골, 경광 등 5개의 마을에 43세대 124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두서리(大豆西里)

  • 신라 때 큰 사찰인 도솔사가 있어서 한도솔, 한두실이라 하였으나 음이 변하여 대도솔, 대두실이라 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 개목산성을 쌓고 이곳에 소(所)를 두었다고 대두소라 하였다. 그후 음이 변하여 대두서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동정을 병합하여 대두서리라 하였다. 자연마을은 한두실과 오동정 2개 마을에 120세대 350명의 주민으로 이루어져 있다.

명리(鳴里)

  • 상산(上山)은 일명 상산(商山)이라고도 하는데 서후면의 중심이 되는 산이다. 천등산에서 굽이쳐 서후면 성곡리로 뻗어 내린 두 봉우리가 수려하다. 전설에 의하면 이 상산에서 위용이 대단한 용마(龍馬)가 태어났는데 이개리(耳開里)에서 귀를 열고 이 곳에서 와서 울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말우리라 하였다고 전한다. 명동이란 지명은 바로 말우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증거리, 송내동, 교동 일부와 서선면의 토탄리 일부를 병합하여 명리라 하였다. 자연마을은 방골, 진걸, 안마골, 두솔원, 옹기마, 말우리, 북쪽골, 독점, 예배당못 등이며 174가구에 46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성곡리(城谷里)

  • 천등산 줄기인 상산이 뻗어 내려 이룬 골짜기에 마을이 형성되어 재일 또는 성곡이라 하였다. 자연마을은 능골, 춘파, 재일, 독실, 덕거리 등 5개이며 118 가구에 356명의 인구로 구성되어 있다.

이개리(耳開里)

  • 행정구역으로 이개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다. 자연마을은 이개 1리에 귀여실, 와우실, 상이개 등 3개이며 79가구에 19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2리에는 보현, 망두골, 관두들 등 3개이며 34가구에 80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송천리(二松川里)

  • 마을을 가로지르는 하천이 2개라고 해서 두시내, 두서천이라 하다가 변하여 이송천으로 되었다. 서후면에서 가장 많은 165가구에 63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자연마을은 미라골, 아래기, 까치개, 양지편, 주누골, 대장골, 제비원, 돈친골, 황사물, 웅골, 본마, 양지골, 거나리, 도촌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내가 둘이 있어서 두시내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이송천리로 되었다.

재품리(才品里)

  • 구한말(舊韓末) 본 마을에 학림(鶴林) 권방(權訪)이란 분이 과거에 급제하여 정 6품의 벼슬을 제수 받은 후 공(公)의 덕망과 인품이 이웃 마을에 까지 널리 알려져 이때부터 이 마을은 재곡의 품(品)을 받은 선비가 사는 마을이라 하여 재품(才品)이라 불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인재가 많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재(才)' 자를 '자(者)' 자로 바꾸어 자품으로 개칭 되었으나, 2017년에 안동시 조례 개정으로 다시 재품리로 지명 변경을 하였다.

저전리(苧田里)

  • 모시밭이 많다고 모시밭이라 불렀는데 한자 표기로 모시 저 자에 밭 전자를 써서 저전이라 하였다. 자연마을은 모시밭, 거리마, 정외, 조랏, 양지마, 삼거리, 무지랑 등 7개이며 206 가구에 61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태장리(台庄里)

  • 고려 공민왕(恭愍王) 6년 궁중에서 이 곳에 태를 묻었다하여 옛 태무지로 불리다가 1914년경 행정 구역 개편시 태장(台庄)이라 개칭하여 안동시 서후면에 속하게 되었으며 현재 1리와 2리로 분리되어 있다. 자연마을은 1리에 중태장, 하태장, 가라골 3개이며 2리에 상태장과 화원 2개이다. 가구수는 135가구에 344명의 인구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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